물갈이-썽풀이

부부는 피로사회, 절벽사회… 자녀는 잉여사회, 중독사회

한시알 2014. 10. 6. 11:49
기획 일반
[창간기획 - 한국 사회는 ○○사회다]부부는 피로사회, 절벽사회… 자녀는 잉여사회, 중독사회
유정인·곽희양 기자 jeongin@kyunghyang.com
ㆍ김동우씨 가족의 하루

김동우씨 가족의 하루에는 여러 ‘○○사회’의 단면들이 스며있다. 

김씨 부부는 일터인 식당에서, 중·고·대학생인 세 자녀는 학교에서 감정사회, 위험사회, 격차사회, 영어계급사회, 중독사회, 절벽사회라 부르는 

‘한국사회’를 살아간다. 지난달 23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 김씨의 집과 식당, 학교를 찾아 관찰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김씨 가족의 ‘○○사회’를 재구성했다.



■ 06:50 절벽사회
고3 딸 은지양의 등굣길


김은지양(18)이 현관문을 조용히 닫고 거리로 나선다. 다른 식구들은 곤히 자는 시간. 고3. 등교 시간이 앞당겨졌다. 전날 밤 엄마가 깎아둔 사과를 먹고 나선 등굣길, 몇 차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휴대폰으로 하늘을 찍는다. 교실을 찍고 싶을 때도 많다. 사진학과 진학은 접었다. 울면서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미안하다’고만 했다. ‘대리충족용’으로 엄마가 사준 카메라는 수능을 마쳐야 제대로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늘 사진 몇 장을 가족 ‘카톡방’에 올리고 걸음을 재촉한다. 대학에 가면 꼭 사진 동아리에 들 것이다.

아버지 김동우씨(52)는 이따금 넘을 수 없는 절벽 앞에 선 것 같다. 4년 전 아들이 외국의 요리학교에 가고 싶어 할 때도 들어주지 못했다. 학교 홍보용 책자에는 월 200만원이 적혀 있지만 유학박람회에 가보니 깨지는 돈이 몇 곱절 더 많았다. 사진학과도 마찬가지. 더구나 예체능 전공은 소수만 밥벌이를 한다고들 하지 않나. 취미라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싶다. 그래도 ‘내가 아이들을 좌절시킨 걸까’라는 생각은 떨칠 수 없다.

■ 09:00 위험사회
아빠 동우씨의 노란 리본


거울 앞에 선 김동우씨가 옷깃에 노란 리본을 단다. 매일 출근 전 치르는 혼자만의 의식이다. 20년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의 아들이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었다. 광화문 단식농성장을 찾아가 만난 친구는 수척했다. 하릴없이 어깨를 주물러주고 돌아서야 했다. ‘네 아들은 대학 갔다며. 내 아들은 죽었어’라던 음성이 맴돈다. 중학교 3학년 딸의 수학여행은 취소됐다. 아이는 실망하는 모습이었지만 못내 마음이 놓였다. 신혼 시절 겪은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외환위기까지 손 놓고 지켜봐야 했던 기억이 늘어간다. 정치권의 세월호특별법 협상이나 정부 대처는 미덥지 못하다. 마음속으로 ‘원칙과 정의가 지켜지면 좋겠다’고 되뇌며 집을 나선다.

■ 09:40 피로사회
동우·성숙 부부의 출근


서울 쌍문동 상가 골목에 동우씨의 빗자루질 소리가 퍼진다. 식당 주방에선 아내 형성숙씨(46)의 청소작업이 한창이다. 부부가 작은 국숫집을 연 건 2009년 초. 동우씨가 20여년간 사무직으로 일한 병원일을 그만두면서부터다. 연·월차 한 번 쓰지 않았던 그지만, 쌓여가는 연차만큼 커지는 퇴직 압력에 마냥 눈을 감고 있을 순 없었다. ‘신입 3명 몫을 해내지 못하면 사주와 조직은 나를 버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져갈 때 ‘강제된’ 자발적 퇴직을 했다.

불안은 또 다른 불안으로 대체된다. 일을 하다 문득 ‘안정적이고 계속된 보장’이 없는 자영업자라는 게 실감난다. 12시간을 서서 일하는 식당일은 고단하다. 아침, 저녁 바람이 서늘해졌다. 올해도 어김없이 ‘비수기’가 돌아온다. 전날 밤 만난 선배는 ‘먹고살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 빗자루를 쥔 손마디에 힘이 들어간다. 

■ 10:30 영어계급사회
아들 재희씨의 스페인어 스터디


성균관대 경영관 복도. 강의실을 옮겨가는 학생들로 소란스러웠던 공간이 금세 도서관처럼 적막해진다. 자투리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이들이 복도에 놓인 책상에 삼삼오오 모여 있다. 재희씨(19)도 책상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스페인어 교재를 펼친다. 지난달 스페인어 알파벳을 뗐다. 변화무쌍한 동사가 만만치 않지만 재미있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익히면 전 세계 인구 절반과 대화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힘이 난다. 영어 실력은 강남 출신 친구들과 비교가 안된다. 재희씨가 ‘어 있잖아’ 할 때, 그 친구들 입에서 흘러나온 건 ‘You know’다. 영어가 그들에겐 모국어인 걸까.

성숙씨는 아들의 영어 고민을 듣다 사는 곳에 따라 영어실력이 정해진다는 말이 새삼 실감났다. 알고 지내는 사제가 ‘강남에서는 주일학교를 열 수 없는 이유’를 맞혀보라고 한 적이 있다. 정답은 ‘아이들이 모두 해외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

■ 11:00 감정사회
동우씨 부부와 직원의 아침 조회


식당 문을 열기 전 동우씨 부부와 직원 4명은 아침식사를 겸해 간단한 조회를 한다. 동우씨는 직원들이 힘찬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부아가 난다. 누군가 ‘오늘 장사 잘될까’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 장사는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잘돼야 하는 것’이다. 조회시간은 불안감을 떨쳐내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때다. “아침에 기분을 ‘업’시켜 놓지 않고는 절대 손님들에게 만족감을 주거나 뭔가를 얻어낼 수 없다.” 동우씨의 확고한 영업철학이다. 내향적인 성숙씨는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매너가 안 좋은 손님에게도, 기분이 별로인 때도 웃는 낯이어야 하는 게 적응이 안된다. 남편처럼 좀 더 외향적이고, 사람 만나는 걸 즐기는 성격이라면 일이 수월해질 것 같다.

■ 15:00 잉여사회
재희씨의 과제 


집에 도착한 재희씨는 곧바로 책상 앞에 앉는다. 저녁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지금부터 ‘영어발표’와 ‘창의적 글쓰기’ 강의 과제를 시작해야 한다. 내년 전공 선택에서 원하는 대로 경제학과에 가려면 최소 3.8점은 받아야 한다. 경제학과와 통계학과가 취업률이 높고, 대학 4년간 남학생 학점 평균 3.5점, 여학생 4.0점 정도가 돼야 좁은 취업문이 열린다는 건 대학 내 ‘상식’이다. 원래 경제학을 좋아하니, 과제를 빼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대학 생활 최대의 ‘로망’이던 ‘드럼’. 입학 후 하루 3시간씩 밴드 활동에 열중했지만, 1학기 성적 3.0점을 받고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만두지 않으면 경제학과를 못 갈 것이 뻔하다. 공부에 열중하는 친구들을 보니 위기감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친구들에게 “80년을 산다고 했을 때 대학 1학년인 지금이 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말하곤 한다. 받아만 준다면 밴드도 다시 하고 싶다. 하지만 그도 친구들도 성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16:50 중독사회
집에 돌아온 막내딸 효지양


‘나 학교 끝났어.’ 가족 ‘카톡창’에 메시지가 뜬다. 막내딸 효지양(15)이 보낸 글이다. 학교를 마치고는 스마트폰과 한몸이다.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웹툰, 유튜브를 오간다. 연예뉴스도 주요 관심사. 막상 온라인에 떠도는 소문과 연예인 관련 기사를 곧바로 믿지는 않는다. 열애설이 뜨면 친구들은 말한다. “다른 사건을 덮으려고 하는 거야.” 

오빠 재희씨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하는 일은 ‘카톡’ 메시지 확인. 스마트폰 화면 대기시간(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시간)과 화면 활성화 시간(스마트폰 쓰는 시간)이 비슷하다. 주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웹툰을 본다. “SNS 소통은 얇고 가느다란 인간관계일 뿐”이라는 친구의 말에 재희씨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도 왜 이리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에 쓰는지 알 수 없다.

■ 20:00 학벌사회
학원에 있는 큰딸 은지양


은지양은 학원 칠판에 적힌 영어 단어를 쏘아본다. 빨리 외워야 하는데…. 흐릿하게 보여 괴로워한다. 아침에 일어난 뒤 대부분의 시간을 문제집과 칠판만 봤으니 그럴 법도 하다.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하는데, 나만 이런가.’ 불안감이 들이친다. ‘딱 10분만 자고 일어나면 좋겠는데…’. 다들 열심히 하는 분위기라 엎드려 잘 엄두가 안 난다.

1학기 때 반 친구들끼리 “못해도 ‘인(IN)서울’은 하자”고 했다. 2학기에는 “경기도 아래 있는 대학에 가지 말자”로 바뀌었다. 잠을 많이 자는 친구에겐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을 가리키며 “네가 갈 학교”라고 놀리는 게 일상이다. 은지양은 ‘고졸이어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대학 이름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도 잘 안다. 어느새 수능은 50일 앞으로 다가와 있다. 다시 허리를 곧추세워 본다.

■ 22:10 주거신분사회
엄마 성숙씨의 귀가


“해 지면 창문 열지 말랬지. ‘저택’에서 또 모기 들어오잖아.” 식당일을 마친 성숙씨가 집에 들어선다. 서울 동선동 작은 주택을 1층만 전세를 냈다. 담벼락을 맞댄 집주인 집을 가족들은 농담삼아 ‘저택’이라고 부른다. 3m가 넘는 담벼락에 막혀 그 넓다는 옆집 정원은 보이지도 않는데, 모기는 잘도 넘어온다. ‘나 사는 곳이 내 집’이라고 생각하지만, 남편은 ‘남의 집살이’가 영 불편하다고 한다. 

1994년 결혼한 부부의 첫 집은 정릉 근처였다. 재건축이 확정된 철거지역. 밤이면 건장한 체구의 용역들이 남은 집들을 살폈다. 집 주변에서 방화도 있었다. 만삭의 성숙씨를 걱정한 남편은 재개발이 취소됐다는 길음동에 두 번째 집을 얻었다. 아이 셋을 길렀더니 뉴타운 개발이 시작됐다. 추가부담금 2억원은 큰돈이었다. 부부는 원주민 70%의 이주 행렬에 이름을 올렸다. 집을 팔아 식당을 마련하니 전셋값만 빠졌다. 방배동 친구를 가끔 만나지만 강남은 남의 나라 같다. 남편도 대치동 사는 친구를 만나면 ‘벽’을 느낀다. 강남 사람들은 정말 드라마처럼 사는 걸까.


■ 가족의 늦은 저녁식사


은지양이 공부방에서 돌아왔다. 등교한 지 16시간. 이날 처음 온 식구가 모여앉아 늦은 저녁을 먹는다. 성숙씨는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며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즐겁다. 주변에서는 고3 수험생 엄마답지 않다며 타박한다. 늦은 밤 딸아이에게 또 ‘공부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자정이 가까워오면 가족들은 각자 자신의 방으로 흩어진다. 성숙씨는 내일 은지양이 먹을 사과를 깎아두고 거실 불을 끈다. 하루는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