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노래

세월이 가면-박인환글/박인희노래

한시알 2014. 10. 31. 15:32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글/박인희 노래-세월이 가면' 

  하늘연달 열이레에 서운산에서 개미취에 앉으려는 등에를 찍다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