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통일부를 외교부에 흡수·통합하는 데 대해 통합신당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평생 통일운동에 몸담아 오신 분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마디로 통일부 없애겠다는 건 잘못된 거요. 철회해야 합니다. 통일부란 것은 정부기관입니다. 우리가 통일하자고 하는 건 정부기관, 다시 말하면 냉전구조의 한 표현인 남쪽도 정부요 북쪽도 정부란 것을 없애자는 겁니다. 그런데 통일부란 것은 냉전구조의 한 소산인 기관이니까 첫판부터 잘못된 겁니다. …그러나 통일부가 생기면서 이 땅에 남아 있는 냉전논리와 냉전구조를 없애는 데 엄청난 이바지를 한 겁니다.
그런데 통일부가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된다, 냉전논리·냉전구조를 타파하는 데 통일부가 앞장서야 된다, 이렇게 고칠 생각을 해야지, 통일부 자체를 없앤다는 것은 이 땅을 새로운 냉전구조 속으로 집어넣겠다고 하는 만행으로 용납해선 안 된다. 진짜 통일부는 남쪽 정부의 대행기관이 아냐! 북쪽을 정책적으로 다루는 기관이 아니라 냉전구조·분단구조에서 허우적대는 민중을 해방하는 그런 일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기구로 개편을 해야 됩니다. 발전을 시켜야 됩니다. 내 얘기가 틀렸수?"
- 그럼 이명박 정부에서의 남북관계에 대해선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난 빤하다고 봅니다. 이명박 후보가 그런 얘기를 하데. 자기는 한미동맹관계를 강화하겠다고. 한미(동맹)관계는 뭘 말하는 거요. 분단상황을 교착시키겠다고 하는 걸 한미(동맹)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반민족적인 것을 깨겠다고 나와야 될 텐데, 한미동맹관계를 강화하겠다고 그러니까, 남북문제를 미국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논리에 따라서 볼 테니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남북관계는 뻔하지요."
-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남북관계가 발전한 것으로 평가하시는지요?
"난 그렇게 보지 않아요. 통일이란 말을 일반적으로 쓰게는 만들었지만 사실상 통일의 실체는 깨뜨렸어요. 자, 이거 보자고.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은 뭐요. 돈놀이를 위주로 하는 미국의 금융독점자본주의 체제에 한반도를 그냥 내주자는 거 아뇨. 여기서 우리 남쪽은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된 거나 다름없는 거야. 그런데 무슨 왔다 갔다만 하면 통일이야. 통일문제를 근본적으로 그르쳐놓고는 왔다갔다만 하는 거 가지고는 안 된다 그거야.
내가 작년 8월 말쯤 '남북정상회담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제목을 가지고 시간을 가졌더니 내 둘레에 있는 젊은이들이 '선생님 그거 부정해야죠' 그래서, '아니다' 그랬어. 우리 민족 성원의 한 사람이라고 하면 민족문제를 갖고서 만나는 것은 천 번도 좋고 만 번도 좋아. 노무현씨 만나라 그거야. 만나서 뭘 할 것이냐, 이런 걸 해라 그랬는데, 정부 관계하는 사람들 하나도 안 왔었는지, 북쪽 가서 내가 들고 나온 얘기가 되어졌다는 말이 하나도 없데."
- 그 강연에서 '남북정상회담'이란 말도 '뚝샘들의 만남'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신 것으로 압니다.
"정상이 뭐야. 영어의 '서미트(summit)'를 우리말로 번역한 건데, 서미트는 정상이 아니지 꼭대기지 뭘 그래. 뭔 꼭대기야. 민중적으로 산 사람이면 아래가 어디 있고 위가 어디 있어. 그럼 뭐야? 뚝샘이야. 끊임없이 솟구치는 샘물을 뚝샘이라고 그래. 십년 가뭄에도 샘물이 솟구친다 이 말이야. 농사 잘되도록 둘레의 메마른 땅을 흥건하게 적셔. 그러니까 정상이라고 그러는 것보다도 뚝샘 그러자고 했는데, 어떤 새끼 내 말 하나 신문에 써주는 놈도 없데."
"무지랭이들도 화해할 줄 아는데, 세상 뒤엎자는 진보주의자들이"
지난 대선 이후 진보세력, 특히 진보정당운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민주노동당은 평등파와 자주파 사이에서 종북주의(從北主義) 논쟁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 특히 선생과의 댓거리 뒤인 지난 3일 임시 당대회에서 '종북주의 청산' 등을 내건 심상정 비상대책위의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분당으로 치닫고 있기까지 하다. 진보세력에게 북한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선생은 "남쪽이 있고 북쪽이 있을 뿐, 냉전구조에서 나온 남한·북한이란 말을 안 쓴다"며 질문을 풀어 하나하나 '맞대'를 했다.
먼저 남쪽 진보세력의 위기론에 대해.
"남쪽 진보세력의 위기다 그러는데, 어떤 게 진보세력이냐? 사실은 가짜 진보세력의 위기야. 난 그렇게 봅니다. 두 번째로 진보라는 건 뭐야. 끊임없이 역사와 함께 창조적으로 나가는 걸 진보라고 그래. 남쪽의 진보세력이 역사와 함께 앞으로 나가는 창조적인 모습으로 자기 혁신을 못 해온 위기가 아니겠느냐 이거야. 세 번째로는 '진보' '진보' 말로만 뇌까리지 말어."
선생은 이 대목에서 '진짜 진보'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약 20년 전 한 술자리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 무렵 "우리 둘레에서 좀 점잖은 분"이 소주를 함께 마시다가 그에게 "백범 김구 선생은 사상적으로는 보수적 아닙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과학적 사회주의에 관해서 깊은 이해가 있었던 분은 아니었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자기 신념으로 삼은 흔적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혹시 책으로 진보가 어드렇고 역사가 어드렇고 그러는 사람들은 백범 선생에 대해서 사상적으로 보수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엔 백범 선생은 그런 차원의 분이 아니야. 그 양반은 사상적으로 어땠는지 몰라도 삶은 진보적이었어.
딱 한 가지 보기만 들께. 돌아가신 다음에 남긴 것은 고무신짝 하나 하고, 총알 맞은 두루마기 하나밖에 없었어. 다 내놓은 사람이야. 집 한 칸 없고, 땅 한 평 없고! 요새는 대통령만 해먹다 나오면 집을 엄청나게 짓는다고 그러데. 아래층에 똥둑간이 여덟 개가 있다면서. 그런 집이 전 세계에 어딨어! (백범 선생은) 그런데는 관심도 없었거든. 삶이 진보적이었다 이 말이야. 그래야 진짜 진보주의자야. 그런데 요새 우리나라에 '진보' '진보'하는 젊은이들은 진짜 진보사상을 창조적으로 반추해서 적용하려고 몸부림을 쳤느냐, 진보적인 사상을 삶으로 구현하려고 애를 썼느냐 이 말이야.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조그마한 정당에서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은 난 별로 관심 없고…."
다음 종북주의 논쟁에 대해.
"종북주의·친북주의 그러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난 몰라. 난 소주만 먹으면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부르다 울어.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거기 우리 어머니가 계시거든. 북쪽만 보면 눈물이 막 나. 누가 날 잘못 보면 종북주의라고 그러지 않겠어. 중요한 거는 진짜 창조적인 방법론으로 진보사상을 오늘에 재현하려고 애를 썼느냐 못썼느냐 그거를 따져야지 종북이다 친북이다 신문용어 갖고 얘기하는 건 답답하지 않느냐 이거야. 또 좀 꼴 보기 싫고 못되고 그랬다 하더라도 갈라서진 말았으면 좋겠어. 그럼 저 사람은 무조건 통합주의자 이럴지 모르지만 난 그런 게 아니라니까.
동무들하고 같이 일을 하다 보면 맘에 안 들잖아. 그럼 술 먹다 멱살 잡고 때릴 수도 있고 '개새끼' '소새끼' 하고 피를 흘릴 수 있어. 그 다음 아침에 찾아가서 어제 코 부러지지 않았어, 입술 터졌지, 미안해 인마, 술 한 잔 더 먹자, 이러는 거야. 하찮은 뒷골목 무지랭이의 우정도 이런데 하물며 세계를 혁명적으로 뒤집어엎자고 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뉘우치고 반성할 생각을 해야지 서로 '니가 옳다' '내가 옳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래."
마지막으로 북한이란 존재에 대해.
"진보주의자가 됐든 이 땅의 젊은이들이 됐든 시민들이 됐든 북쪽을 어떻게 볼 것이냐? 강요되는 냉전논리와 나름대로 몸부림치는 상처투성이의 피눈물이 고인 땅이라고 그렇게 보는 거야. 우리 어머니도 거기 계시잖아. 얼마나 냉전구조가 무시무시한 데 그래. 잡혀가 봤어? '인마, 너 어제 제물포에서 전화받았지?' '난 제물포에서 전화받은 적 없는데요' '김일성한테서 전화받지 않았어?' '난 김일성이와 전화 연결이 안 되는데요' '이 새끼가 무전으로 연락했잖아' '난 무전 다룰 줄 모르는데요' '이 새끼 아직도 덜 맞았구나', 때리는 거여. 아시겠어?"
북쪽 전체가 아니라 '북한정권'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하는지 다시 물었다.
"이거 봐. 그 얘기는 이런 시간에 묻는 것도 아니고, 그건 내가 삶으로 늘 말하고 있어. 북쪽은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적성국가고 타도의 대상이거든. 그러면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키자는 거야. 국가보안법은 바로 전쟁도발적인 법률제도야, 없애야 된다고. 국가보안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서 북쪽을 어떻게 봐야 되냐고 물으면 난 말하고 싶은 게 딱 하나밖에 없어, 국가보안법 없애야 된다, 그 말밖에 안 하갔어."
- 그럼 우리 시대 통일운동은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까요? 개개인들이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좋은 거 물어봤어. 이제부터는 어떤 것이 통일이냐 하는 가장 구체적인 놀이를 할 때요. 통일만이 희망이라고 하는, 희망의 알짜(실체)를 내놔야 되는 거야. 남쪽은 미국의 한 주가 됐잖어. 노무현씨도 그랬고 이명박씨도 그렇고, 다 그렇게 만들었잖아. 그런데 무슨 통일이야. 이제부터 어떤 게 통일이냐, 그런 문제를 서로 고민하면 어떻겠느냐 그런 얘기야. 통일은 희망이야! 하제라고!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 금강산이나 가고, 백두산이나 가고. (지금) 통일 됐다고 치자 그거야. 국경이 없어졌다고 치자 그거야. 돈 많은 놈들이 금강산 가서 선녀탕에다가 별장을 지으면 거기서 오줌 똥 나와 맑은 물 다 썩을 거 아냐. 그것도 통일이야? 난 아니라고 생각해."
영어천재에서 우리말운동가로... "영어공교육강화는 아주 고약한 발상"
선생은 민주투사·통일운동가뿐만 아니라 우리말운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요즘 대학가에서 흔히 쓰는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등의 우리말도 그에게서 비롯했다.
지난해엔 사람 이름과 숫자, 지명을 빼고는 순우리말로만 된 '이야기꾸림(소설)' <따끔한 한 모금>을 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젊은 시절 '영어천재'로 불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선생의 평생지기인 방동규씨는 그의 자서전 <배추가 돌아왔다>에서 선생을 만날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내 나이 열아홉, 백기완은 스물. 그 시절 백기완은 청년운동가이자, 영어 천재로 유명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인데도 영어학원 강사로 활약했고, 길 가며 영어 단어 외우느라고 전봇대에 부딪혀 코피를 줄줄 흘린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 인수위가 추진하고 있는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 때문에 나라가 들썩들썩합니다. 선생님은 젊은 시절 영어 천재로 유명했고, 지금은 우리말운동가로도 유명하신데, 인수위의 '영어 공교육 강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잘못됐어. 아주 고약한 발상이라니까."
이어 선생은 "8·15 해방 고때 후야, 고때 후, 직후란 말보다는 그 말이 더 아름답지?"라며 자신이 영어 공부를 하게 된 까닭을 먼저 들려줬다. '8·15 해방 고때 후' 그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남쪽으로 내려왔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에게 축구를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다. 그는 맨발이었다. 어느 날 맨발로 전차를 탔다가 소매치기로 몰려 경찰서에 끌려갔다. 자신은 소매치기가 아니라 "혼자 공부하는 애"라고 그러자 경찰이 "그럼 영어를 아는 대로 얘기해봐"라고 다그쳤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영어교과서를 그 자리서 다 외웠어. 영어 잘한 게 아니야. 약 오르니까 다 외운 거야. 축구선수 안 돼 학교도 못 다녀 약 오르니까 이를 악물고 외우는 거야. (경찰이) 손 내놓으래, (그리고) 나가. 영어 잘하는 거 보니까 학생이다 그거야. 그때 깨달았어. 내가 영어 공부는 하지만 영어 조금 하면 소매치기로 몰렸던 사람이 혐의가 금방 풀려나, 분명 잘못된 거 아니냐 이거야.
그러고 나서 공부를 좀 해가지고 17살 됐을 때는 웬만한 (영어) 소설책 잡지책 사전 없이 그냥 봤어. 그러니까 신문에 영어 좀 잘한다고 났었는데, 내 얘기는 그렇게 영어 잘했다고 해봐야 써먹을 데가 없어. 난 미국놈 앞잡인 싫으니까, 죽어도 그딴 건 안 하니까. 그런데 영어를 잘해야 잘산다고 이명박 당선자가 말했다고 신문에 나오데. 난 영어를 잘 했는데도, 천재라고 몰릴 정도로 영어를 잘 했는데도 난 잘 살아본 적 없어. 암만 영어 잘 해봐야 배고픈 건 마찬가지야. 영어를 잘못 팔아먹으면 앞잡이밖에 안 되고. 영어를 무조건 하지 말자는 게 아니야. 초등학교에서도 하고 중학교에서도 하고 고등학교에선 선생이나 학생이나 영어로 강의한다나, 안 되는 거야."
선생의 이야기는 2002년 축구세계대회(월드컵) 때로 이어졌다.
"그 때 내가 울면서 호소했어. 파이팅이란 말 쓰지 말라고. F-I-G-H-T-I-N-G(그는 알파벳을 한 자한 자 발음했다), 싸우자, 죽여라, 그런 얘기 아니야? 왜 만날 알지도 못하는 그런 말을 써. 그러지 말고 '아리아리' 그러자 그거야. 아리아리 아리랑 쓰리쓰리 쓰리랑~. 그 노래 알죠? 아리아리라는 건 없는 길은 찾아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길을 내자는 뜻이에요. 없는 길을 찾아가자 아리아리~, 그러면 오죽 좋아. 얼마나 문화적이고 예술적이고 평화적이야. (그런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도 뭣도 모르고 파이팅이래요. 때려죽이자는 얘긴데 말이야."
선생은 '아리아리'처럼 '새내기' '동아리' 등 새로운 우리말을 만들어 퍼뜨리기 위해 애써 왔다. 관련해서 어린 시절 중학생들을 따라간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보고 '속꽂이'라고 말했다가 중학생들에게 매를 맞은 경험을 얘기했다.
"그때 내 말대로 속꽂이란 말 썼으면 지금 다이빙이란 말 안 쓰고 속꽂이가 됐을 거 아니야. 재떨이가 뭐야. 애쉬트레이(ashtray) 아냐? '애쉬'는 재, '트레이'는 턴다는 거 아니야. 우리가 그때 애쉬트레이 했으면 재떨이는 없어진 거야. 말은 끊임없이 역사와 함께 빚어내는 거야. 어떤 신문에서 백기완 선생이 (말을) 만들어냈다고 뭐라 그래. 만들면 어때! 대한민국 간판 보라고 몽땅 미국말 아니야. 그래서 이명박씨가 영어 잘 하면 잘 산다 그런 말 집어치우고 지금 미국말 때문에 우리말이 다 죽어간다는 깨우침을 좀 가졌으면 좋겠어. 아무튼 정권 잡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잘해주면 나쁠 건 없잖아. 나는 때려죽이자고 반대하자 그런 게 아니잖아. 올바로 하자는 거지."
선생은 '달동네'란 말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50년대 초 부모 잃은 아이들을 모아 야학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마침 눈이 오고 달이 뜨니까 깨진 잿더미가 그렇게 예쁘더라고." '달동네'란 말이 떠올랐고, <달동네소식>이란 유인물을 만들어 돌렸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끌고가 거꾸로 매단 채 발로 차며 '빨갱이'로 몰았다. '너 빨갱이지!' '내가 왜 빨갱입니까?' '달동네라고 그러면 되냐 하꼬방이라고 그래야지.' '그건 왜말인데요?' '왜말 싫어하는 거 보니까 빨갱이야.' 일주일 동안 실컷 매 맞고 나왔다.
"그 뒤로 어떻게 된 게 달동네란 말은 요새 어느 소설 보니까 나오고 방송에서 쓰는 사람도 더러 있고 그러더라고. 우리 신경림 선생 시에는 달동네가 아니고 산동네 그랬더라고. 산동네도 좋지만 달동네가 좀 문학적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뭐 내 말 들어? 내 말 안 들어요."
- '부심이'가 선생님의 덧이름(별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웹사이트와 이메일 주소도 '부심이(busimi)'로 돼 있는데 무슨 뜻인가요?
"옷 이름이요. 사내새끼는 풀빛 바지에다가 빨간 대님을 매고, 빨간 저고리에다가 풀빛 고름을 맨 옷을 부심이라고 그래. 계집애는 풀빛 치마에다가 색동저고리 입은 거, 아니면 빨간 치마에다가 노란 저고리 입은 걸 부심이라고 그래. 풀빛 바지에다가 빨간 대님을 매고, 빨간 저고리에다가 풀빛 고름을 매고서, 눈이 허옇게 내린 벌판에 서면 봄이 오는 거 같아. 그 빛감으로 해서 얼어붙은 게 다 녹아내리는 거 같아. 우리 어머니가 부심이란 옷도 한 벌 해주지 않고, 내 덧이름을 부심이라고 한 것은, 왜정시대에 일본놈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어도 꽁꽁 얼어붙어도 네가 나타나면 봄이 되는 거처럼 부심이로 살거라, 그래서 부심이라고 불렀어. 부심이란 말 괜찮죠?"
이밖에도 선생의 우리말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파도 대신 '몰개'란 우리말을 퍼뜨리려고 애쓰지만 잘 안 된다는 얘기,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중앙일보>에서 '새뚝이상'을 만들었다는 얘기…. 기자에게 <오마이뉴스>가 뭐냐고 꾸짖고는 대신 '누리하제(세상의 희망)'란 새 이름을 제안하기도 했다. 또 '모꼬지'란 말은 말뜻을 잘못 쓰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파리를 보고도 모기를 보고도 모가지를 들이대는 걸 보고 모꼬지라고 그래. 저 새끼 순 모꼬지다 그러면 온몸으로 산다 그거야. 그런데 요새 모꼬지 그러면 대학가에서나 노동운동판에서나 회의 하러 가는 걸로 알아요. 말뜻을 잘못 써먹고 있어. 회의, 그게 아니고 온몸으로 들이대는 거 그걸 모꼬지라고 그래."
"대운하? 정말 나가려면 큰 바다, 큰 대륙으로 좀 나가지"
>- 이명박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장 중단해야 돼! 대운하가 뭐야! 얼마 전에 로서아(러시아) 놈들이 말이야. 저 북극바다 4000미터 밑에다가 로서아 깃발을 꼽고 요건 우리땅이다 그거야. 왜냐? 거기서 나오는 석유는 자기네 거다 이거야. 아이고, 정말 나가려면 큰 바다, 큰 대륙으로 좀 나가지. 요 손바닥만한 거 38선으로 갈린 것도 뭣한데, 여기서 부산까지 갈라놓고 여기서 전라도까지 갈라놓고 그러면, 어려운 말로 생태계는 다 깨지고, 그 물이 썩어. 물이 흘러야 할 데 잘못 흐르면 그게 무슨 큰물이냐고.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생태적으로도 그렇고, 전연 그건… 이 땅덩어리를 아주 망치는 거야. 당장 때려치워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도 조금 생각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여론들을 거둬보면 뭐 거두지 않겠어요?"
- 지난 대선 표심도 그렇게 읽힐 수 있는데, 사회 전체가 보수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특히 대학생들도 그렇고 젊은 층의 보수화 흐름이 눈에 띕니다.
"몇 가지 까닭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꼽을게. 요새 젊은이들한테는 니 힘껏 경쟁에서 이겨라 이거야. 남을 죽여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 대학도 좋은 데 가고 취직도 한다 이거야. 경쟁만능주의를 우리에게 불러놓거든. 경쟁에서 진 놈은 희망이 없고 경쟁에서 이긴 놈은 한두 놈 취직한다 이거야. 여기서 어떤 생각이 오느냐. 아무리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르게 노력을 하더라도 경쟁에서 지면 안 된다 이거야. 있는 놈이 장땡이다 그거야. 거짓말해서라도 거머쥔 놈이 장땡이다, 그런 놈들이 다 대통령 해먹고 그런 놈들이 다 재벌 아니냐 그거야. 여기서 엄청난 좌절과 절망에 빠진 거여. 좌절과 절망에 빠진 것을 (보고) 보수화됐다, 그렇게 난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들에게 희망을 줘봐. 경쟁이라고 하는 잘못된 자유주의 논리를 강요하지 말고 진짜 깨우치고 올바로만 살면 예쁘고 아름답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면 그들의 보수성 같은 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 좌절과 절망에 빠진 시대,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혁명적 분위기가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말을 내가 수십 년 하고 다녔어. 예술이, 문화가 앞장서야 돼. 그러려면 상업지 예술성으로부터 우선 탈피해야 돼. (또) 문화를 정부에서 돕는다? 정부에서 돕는 건 어용문화고 어용예술이야. 무지랭이들이 맨 바닥에서 언 땅에서 지고 일어서는 '나네'처럼 들고 일어나야지. 제일 아름다운 여자, 예쁜 여자를 우리말로 '나네' 그러거든. 언 땅을 지고 일어서는 새싹이 나네거든. 언 땅을 지고 일어서는 가냘픈 새싹처럼 고개를 들어서 엄청난 예술운동이 일어나야 돼. 나는 벽시운동 같은 게 일어나야 되지 않느냐 이거야. 시를 이런 조그마한 하얀 종이에다가 의탁하고 기대해서 되겠어. 넓은 벽면 있잖아. 시가 밖으로 나와야 돼. 그림도 요만한 액자에다가만 그릴 생각 말고, 저 넓은 공간, 벽 있잖아. 그걸 그림의 종이로 써먹자 그거야. 진짜 삶하고 같이 있도록 만들자 말이야.
우리말에 진짜 멋진 사내의 팔뚝은 갯바람에 절은 밧줄 같다고 그랬어. 갯바람에 절은 밧줄이란 건 말이야 알통운동해서 이두박근 삼각근 나온 알통이 아니라고. 노동성, 생산성이 아로새겨져 있는 힘살(근육)을 갯바람에 절은 팔뚝이라고 그랬거든. 또 우리 남자의 다리는 무너지는 벼랑을 거머쥐는 솔뿌리 같다고 그랬거든. 벽에다가 이런 다리를 그려야 된다고. 돈놀이하는 놈을 우리말로 뭐라고 그래? '납쇠'라고 그래. 가장 죽일 놈, 샤일록 같은 놈을 납쇠라고 그래. 샤일록, 납쇠, 그런 놈이 아니고 언 땅을 지고 일어서는 나네와 같은, 가냘프지만 새싹과 같은 고런 예쁜 여자, 예쁜 사내, 고런 예쁜 예술운동, 문화운동을 일으켜야 된다 그거야. 왜 모든 혁명이 늪에 빠졌는데 예술은 가만히 있느냐 그거야. 왜 팔아먹으려고만 그래! 예술을 상품화하려고만 그래! 그러지 말라 그거야."
"통일은 '노나메기 벗나래'를 만드는 일"
선생은 올해 두 가지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고 했다. 첫째는 '참된 통일은 무엇인가'하는 주제로 특강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게 통일이냐는 문제를 지금 우리가 똑똑히 헤아릴 때가 온 거야.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 통일부를 없애겠다는 게 아니야, 올바른 통일운동을 죽여 버리겠다는 거 아니야. 한미동맹을 강화하겠다는 게 그거거든. 이럴 때 통일만이 희망이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통일의 알짜는 '노나메기 벗나래'를 만드는 거다 이거야. 노나메기는 무슨 뜻이냐. 옛날 우리들의 사회주의란 말이야.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야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 때 올바로 잘살자, 그런 말을 우리말로 노나메기 그랬거든. 벗나래는 세상이야. 벗이란 이웃이란 말이야. 이웃이 나래를 폈어. 한동네란 말이지 뭐, 세상이야. 노나메기 벗나래를 만드는 것이 통일이다 그거야,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되는 것이 통일이 아니고! 이 땅별(지구)을 망치는 환경파괴물질 같은 걸 막 내버리고 자기 돈만 벌고 떵떵거리는 거,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남의 나라 주식시장을 다 망쳐먹고 자기만 잘사는 거는 올바로 잘사는 게 아니잖어.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째는 납쇠, 돈놀이꾼을 없애야겠다 그거야. 둘째, 쫄망쇠를 없애야겠다 그거야. 먹을수록 속이 좁아지는 사람 있잖아. 먹을수록 속이 커져야 할 텐데 먹을수록 속이 좁아지는, 아주 썩어 문드러진 돈 많은 사람들 있잖아. 세 번째론 뼉쇠를 없애야 돼. 순정을 겁탈하는 놈을 뼉쇠라고 해. 약한 여자, 약한 사내를 겁탈하는 놈들 있잖아. 이 세 가지를 없애지 않으면 올바로 잘살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전통문화에 나와. 그런 특강을 좀 하고 싶고, 신청 좀 하라고 해."
둘째, 우리의 민중사상, 민중해방사상, 민중문화, 민중예술의 뿌리에 관한 '원형'을 빚어 읽기 쉽게 책으로 꾸며 펴낼 계획이다. 열다섯 편가량의 얘기를 엮을 생각이며, 지금 그 가운데 '버선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온몸에 걸친 것 없이 감추는 것 없이 그냥 내놓고 사는 버선발'. 노비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버선발'이 여러 일을 겪고 난 뒤 '뚱속(욕심)이 없는 사람을 만들 수 있는 틀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는 얘기다. 선생은 구수한 입담으로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버선발 이야기'를 들려줬다(☞ '백기완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버선발 이야기' 바로가기).
- 이제까지 말씀에 따르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살기가 더 어려운 시절이 될 듯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 시에 비문(碑文)이라는 시가 있어. 죽은 사람 무덤 앞에다 세워놓는 비석에 있는 글이란 말이지. '익은 낱알은 죽지 않는다 / 떨어질 뿐이다 / 산새 들새들이여 / 낱알은 물고 가되 울음은 떨구고 가시라', 그런 시가 있어.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낱알을 누가 먹든지 끊임없이 밭을 일구고 김을 매고 물을 주고 낱알을 익히는 거야. 그게 역사여.
젊은이들이여, 아니면 여러 시인들이여, 우리도 누가 그 낱알을 먹든지 낱알을 익히겠다고 하는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지자 그거야. 그래서 그 낱알을 이름 모를 산새 들새가 물고 가더라도, 너가 가지고 가서 먹어, 그러나 울음은 한번 울어달라, 노래나 한번 하고 가라, 그 말이야. 이런 인생관, 이런 가치관을 가지면 조금 올바른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