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통일운동을 8·15 직후부터 하고 있어.” 이 말 한마디에 사실은 계 선생의 삶이 모두 드러났다고 하겠다.
 
계 선생은 주민증이 없었다. 아니 가질 생각이 없었다. 분단된 정부는 받아들일 수가 없고 따라서 낑기질 않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동사무소도 못 가고, 비행기도 못 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참아낸 그 힘은 백범 선생의 자주적 해방 통일운동의 불씨라, 그것을 그 삐꺽 마른 몸에 죽어라 하고 간직해온 그 의지, 그 끈기 그것은 강요된 분단을 출세의 기회로 삼으려는 시커먼 뚱속(욕심)들을 한칼에 일깨우는 자주 의지가 아니었을까.
 
이참 한반도엔 제 놈들이 갈라놓고 그 안보를 앞세운 전쟁놀음이 한창이다. 이런 때 우리 계 선생의 가르침을 떠올리자는 것이다.
 
1960년대 허리께, 미국의 지령으로 한일협정이 강요될 적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하나같이 맞서야 할 야당이 딱하니 둘로 갈라졌다. 한일협정은 매국행위라 국회의원직을 버리고서라도 민족의 이익을 지키자는 패와, 아니다 국체인 의회주의를 지키자는 패로 갈라져 힘을 잃자, 박정희는 이때다 하고 한일협정을 강행, 영구집권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자 재야에선 야당에 맵찬 규탄이 일었다. 첫째, 매우 중차대한 민족사와 세계사의 진운을 앞에 두고 갈라서는 건 자멸적 반역이다. 둘째, 박정희 군사독재 끝장을 놓고 정권 장악의 기회나 노리는 건 민주 배신이요, 용서 못할 분열주의적 패배주의라고 말뜸(문제의 제기)이 일자 가장 앞장섰던 분이 바로 계 선생이었음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계 선생은 매우 의도된 헐뜯기로 어지러운 상채기를 받기도 했다. 분단을 국가주의적으로 굳히자는 사람들한테는 백범 노선이라고 헐뜯기고, 진보적인 이들한테는 해묵은 보수반동이라는 터무니없는 모략에 시달리기도 했다.
 
요즈음도 매한가지, 어떤 이는 그분은 조직도 없고 권력 의지도 없는 뜨내기였다 그러고, 또 어떤 이는 그분은 참 자유해방의 실체가 없는 헤설픈 자유주의자라 재야에서도 존재가 없던데요 그러기도 하고.
 
눈물이 왕창 폭발하려고 한다. 그래서 또박껏 밝히고자 한다. 일제식민지 때다. 평양비행장 공사장에 끌려가자 거기를 폭파시키려고 하다가 붙들려 갖은 고생을 하셨더랬다. 해방 뒤 서울대를 다닐 즈음엔 백범 선생의 통일 노선에 한꺼번에 깨우쳐 분단독재와 맞싸우는 투사로 발전했고, 4·19혁명 뒤엔 교원노조 조직에 함께했으며,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재야의 어르신네로 싸우셨지만 내가 권력자가 되겠다, 내가 유명인사가 되겠다는 그런 덜된 생각 따위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이 모두를 바쳐 싸우다 가신 분이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개고기를 그렇게 좋아했으되 단 한 번도 혼자 자시러 가신 적이 없이 늘 허름한 일옷에 고무신을 끌며 한사코 싸우는 한복판에만 서 계시던 아, 계훈제 선생님.

 
박근혜 독재를 끝장낼 생각은 않고 내부 권력·알력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이른바 야당 사람들은 계 선생 앞에 두 무릎을 꿇어라. 그리하여 썩어문드러진 박근혜 독재 연장 음모를 분쇄하려는 싸움에 모두를 바쳐야 하는 게 아닌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