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가락과 노랫말이 조금씩 다릅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언제부턴가 진보적 진영의 공식집회에서는 '민중의례'라는 절차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에서 애국가 봉 창으로 이어지는 '국민의례'의 형식을 빌어 그 내용을 새롭게 채운 것이다. 그 민중의례에 애국가 봉창대신 들어가 있는 것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런 노래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진보적 노래문화의 대표적 작품이며, 1981년 광주에서 만들어져 순식간에 전국 대학가로 퍼졌고, 6월 투쟁과 7.8월 투쟁을 통한 노동자, 시민 대중들에 까지 확산된 노래, 심지어는 외국인들조차도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가요로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노래이다. 작사자는 누구인가? 이 노래의 작곡자가 제1회 대학 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을 부른 김종률이라는 것은 많이 알 려졌으나, 가사를 누가 지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김종률이 작사까지 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했었고, 그 후 어느 바지런한 대학 노래패 학생이 그 가사의 구절구절이 백기완 시집 "젊은 날"에 수록된 '가신 님', '우리들의 합창'속에 흩어져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그때부터 '백기완 작시(作詩)'라고 노래책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 12월에 나온 시집 "젊은 날"의 증보판에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 꾼에게 띄우는'이라는 장시가 실림으로써 이 노래의 가사가 백기완의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이 시의 삽입 노래의 형식으로 '님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거의 그대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위줄임)
(아래줄임) 이 장시 '묏비나리'는 1980년 12월 에 씌여졌다. 그때 백기완은 제 5공화국 출범과 함께 이루어진 대대적인 탄압으로 심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요양을 하고 있던중 치료비를 만들기 위해 그 동안 썼던 작품을 모아 추려 불문학자 전채린의 주선으로 '젊은 날'이라는 시접을 1982년 출판하게 되는데, 그 때 이 '묏비나리'는 서슬 퍼런 제 5공화국 초기로서는 발표되기 어려운 시라 작품을 추리는 과정에서 빠뜨린 것이 10년뒤인 1990년 12월의 증보판에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한 편 이 시집 출판의 기획이 시작될 즈음 황석영은 이 시들을 입수하여 광주에서 노래굿 '넋풀이'를 만들면서 가사화 하였다. 노래굿 '넋풀이'(일명 '빛의 결혼식')는 이전에 극회 '광대'에 모여 있었던 광주지역 연행예술운동패 성원들이 1981년에 만든 노래극 작품이며, 당시 황석영은 광주에 살면서 광주지 역 연행예술운동패들과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었고, 윤만식(전 '신명'대표), 오창규(전 '광대' 회원, 현재 광주 MBC프로듀서)가 주축이 되었던 이 작품 창 작에도 관여하여 '무등산 자장가'등 몇 작품의 가사를 지었다. '넋풀이'는 광주지역 연행예술운동의 초창기 성원이자 광주항쟁 때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 청에서 전사한 윤상원과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당시 전남대 국사교육학과 3년)의 영혼결혼식을 모델로 하여, 광주항쟁에서 숨진 남성 노동자와 여대생의 영혼 결혼식이라는 틀과 인물들을 설정하고 노래와 시낭송, 간단한 대사, 멘트 등으로 엮은 30여 분 정도 길이의 소품이다. 이 작품은 테이프로 제작되어 몰래 보급되었으며 후에 공연도 이루어졌다 (여기서 테이프는 스튜디오도 아닌 그냥 방에서 작은 카세트 녹음기를 놓고 녹음 할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광주 항쟁의 패배감을 극복 '님을 위핸 행진곡'은 영혼결혼을 한 두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넋풀이'의 가장 마지막 곡이며 오창규의 목소리로 녹음되어 있다. 기타와 꽹과리의 반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호탕하면서도 투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지금 우리가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고 부르는 마지막 구절이 원래는 '앞서서 가나니'였다는 점은 이 노래의 맥락을 짐작하게 한다. 즉 두 영혼 이, '우리는 앞서서 가니, 살아 잇는 자들이여, 기운을 내어 뒤를 따르라'고 독려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다짐하는 내용인 것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 은 1980년대 초 광주항쟁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승리의 의지와 투쟁적 역동성을 획득해낸 최초의 작품이다. 광주 항쟁 직후인 1981년에 광주항쟁 은 '항쟁'으로서보다는 '대학살'로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죽음에 충격받고 주체할 수 없는 패배감과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자괴 감, 죄의식에 젖어 있었고, 이러한 패배감과 자괴감은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까지 진보적 지식인들 속에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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