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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피아프 - 라 비 앙 로즈(장미빛인생)/ Edith Piaf - La vie en rose

한시알 2015. 1. 11. 04:25

에디트 피아프 샹송의 여왕, 프랑스의 국민가수 Edith Piaf, 1915. 12. 19~1963. 10. 11

푸른하늘이 무너져버리고 땅이 뒤집힌 하여도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날 사랑해준다면 난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사랑이 밀려오는 동안에는 내 몸이 당신의 팔 안에서 떨리는 동안에는
그런건 아무 상관없어요
내 사랑이여, 난 지구 끝까지라도 가겠어요. 
내 머리를 금발로 물들일 수도 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

당신이 죽어서 나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어도 
괜찮아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나도 죽을 테니까요. 우린 영원히 이어져 있어요,
무한한 푸른 공간 속 하늘에선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 사랑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걸 믿나요?
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줄 거예요
-에디트 피아프 ‘사랑의 찬가’ 중에서

거리에서 노래하는 작은 참새 

 

에디트 피아프 이미지 1

 

위는 프랑스의 목소리이자 샹송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에디트 피아프가 직접 작사한 곡 ‘사랑의 찬가’ 일부 가사이다. 이 노래는 에디트 피아프가 사랑하는 연인 마르셀 세르당이 죽은 뒤 슬픔 속에서 지은 노래이다. 연인의 죽음도 노래로 애도할 수 밖에 없는 천상 가수였던 에디트 피아프는 프랑스의 서민 대중가곡인 샹송에 딱 맞는 구슬프고 처연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는 아름다운 목소리로만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그녀가 부르는 슬프고 고독한 노래의 가사처럼 그녀의 드라마틱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전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가수란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노래한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노래 그리고 삶 속에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에디트 피아프는 그 삶의 처음부터가 불우했다. 그녀는 1915년 파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에디트 피아프는 훗날 그녀가 얻은 예명이고 본명은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Edith Giovanna Gassion)이다. 일설에 의하면 길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그만큼 그녀의 부모는 아이를 키울 수 없을 만큼 가난했고 의지도 없었다. 아버지는 거리의 곡예사였고 어머니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계 혼혈로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 아이를 키울 형편도 아니었고 뜻도 없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에디트를 낳자마자 자신의 어머니 즉, 에디트 피아프의 외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사라졌다. 에디트를 맡은 외할머니도 양육에 뜻이 없었다.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었던 에디트를 그녀의 아버지가 거두어 다시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에디트의 친할머니는 노르망디에서 매춘업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에디트란 이름을 지어준 그녀의 아버지는 곧이어 1차대전에 참전하여 떠나버렸고 에디트는 할머니가 경영하는 매춘업소에서 몸을 파는 여인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에디트란 이름은 1차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로 있던 프랑스 병사들을 탈출시키다가 사형당한 영국의 간호사 이디스 캐블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고 한다. 전쟁통이었고 지독한 가난과 환경 탓에 에디트는 제대로 된 양육을 받지 못했다. 늘 영영실조에 시달렸고 3살부터 6살까지는 각막염을 앓아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병이 나은 것은 에디트를 아끼던 한 매춘여인이 그녀를 데리고 성녀 테레사의 성지에 가서 기도를 올린 덕이란 이야기도 있다.

어린 시절의 에디트 피아프

 

14세 무렵 아버지가 찾아와 그녀를 자신의 거리 곡마단에 참가시켜 잡일을 시켰다. 에디트는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전역을 전전하였다. 그녀가 언제부터 노래를 부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를 따라 다닐 즈음엔 이미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벌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 불화했던 에디트는 1년만인 15살에 아버지와 결별하여 혼자서 거리의 가수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 시기 그녀는 이후 평생의 친구가 된 시몬느 베르토(Simone Berteaut)를 만났고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에디트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 아이를 잘 돌볼 수 없었다. 생계를 위해 거리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아이는 아팠고 뇌수막염에 걸려 죽었다. 에디트의 사랑도 깨졌다. 에디트 피아프에게 비루한 현실은 노래와 술 한잔으로 잊어야 하는 것이었다.

스무 살 무렵까지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며 노래를 부르던 그녀에게 뜻밖에 기회가 왔다. 파리 피갈거리에서 노래 부르던 에디트를 당시 잘나가던 나이트클럽의 사장 루이 레플리가 발탁한 것이다. 어렸을 때의 영양실조 탓인지 키가 142cm 밖에 되지 않던 에디트는 작은 새가 노래하는 것 같았다. 루이 레플리는 프랑스 속어로 참새를 뜻하는 피아프(Piaf)란 단어를 붙여 그녀에게 라 몸므 피아프(La Mome Piaf: 작은 참새라는 뜻)란 예명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단아한 검정색의 무대의상을 입게 했다. 이 검은 의상은 이후 에디트 피아프 평생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키가 142cm 밖에 되지 않았던 에디트 피아프의 예명은 작은 참새라는 뜻의 ‘라 몸므 피아프’였다. 단아한 검정색의 무대의상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레플리에게 발탁 된 후 2년간 에디트 피아프는 승승장구했다. 두 장의 앨범을 냈고 호평을 받았으며 많은 연예계 사람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가 발목을 잡았다. 에디트 피아프와 관련이 있던 폭력조직이 에디트 피아프를 발탁했던 나이트클럽 주인 레플리를 총으로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사건자체에 에디트 피아프는 관련이 없었지만, 범인이 에디트 피아프와 아는 사람들이란 것이 문제였다. 레플리가 에디트 피아프를 발탁하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다시 거리로 내팽개쳐졌다.

장밋빛 인생, 사랑의 찬가

 

절망에 빠진 그녀를 구한 것은 작사가 레이몽 아소였다. 그는 그녀의 이미지를 로맨틱하게 바꾸고 라 몸므 피아프라는 예명대신 에디트 피아프란 예명을 붙여주었다. 이때부터 에디트는 평생을 에디트 피아프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미지를 쇄신한 에디트 피아프는 1940년 프랑스의 대문호인 장 콕토의 작품을 일인 연주하면서 완전히 슬럼프로부터 회복했다.

이후 그녀의 삶은 장밋빛 인생과 같았다. 그녀는 프랑스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그녀에게 노래를 주고 싶어했고 대중들로부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당대 유수한 예술가들로부터는 찬사를 얻었다.

이시기 그녀는 많은 연애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이브 몽땅이 있다. 그녀의 유명한 노래 ‘장미빛 인생’은 그녀가 직접 작사한 것인데, 이브 몽땅과의 연애시기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쓰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 가사 중 일부는 이러하다.

내 시선을 내리깔게 하는 눈동자. 입술에 사라지는 미소. 이것이 나를 사로잡은 그 분의 수정하지 않은 초상화예요. 그가 나를 품에 안고 가만히 내게 속삭일 때, 나 에게는 장미빛으로 보이지요. 그가 내게 사랑의 말을 할 때는, 언제나 같은 말이라 도 나는 정신이 어떻게 되고 말지요. 내 마음 속에 행복의 분신이 돌아온 거예요. 그 까닭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나를 위한 그, 그를 위한 나라고 그 분은 내게 말했고, 목숨을 걸고 맹세해 주었지요.

이브 몽땅과 에디트 피아프(1946년 1월 1일).

많은 남자들과 사랑을 했지만, 훗날 에디트 피아프는 자신이 평생 사랑한 남자는 단 한 명 마르셀 세르당 하나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마르셀 세르당은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권투선수였고 그 즈음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었다. 그는 북아프리카계 프랑스인으로 신사적 매너와 탄탄한 외모, 신실한 성격 등으로 많은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았다. 마르셀 세르당은 에디트 피아프를 만날 당시 이미 세 아이를 둔 유부남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에 머물며 순회공연을 열던 에디트 피아프는 역시 경기를 위해 미국에 온 마르셀 세르당을 뉴욕에서 만났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세간의 비난을 받기도 전에 이 사랑은 비극적 종말을 맞고 만다. 1949년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던 마르셀 세르당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마르셀 세르당의 죽음으로 에디트 피아프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마르셀 세르당과의 사랑을 생각하며 절망 속에서 그녀가 직접 작사한 노래 ‘사랑의 찬가’는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에디트 피아프의 마음은 텅 비어 가기만 했다. 그 자리를 서둘러 메우려는 듯 에디트 피아프는 결혼을 서둘렀지만 이 결혼은 4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그 사이 에디뜨 피아프는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그 후유증을 견디기 위해 손을 대기 시작한 모르핀에 중독되고 말았다. 이후 에디트 피아프는 모르핀 중독을 고치기 위해 몇 차례나 재활센터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끝내 중독을 치료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이 모르핀 중독이 그녀의 삶을 갉아먹고 일찌감치 생을 마감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에디트 피아프는 1962년에도 20년 연하의 그리스 출신 헤어디자이너이자 가수, 배우였던 테드 사라포와 마지막 결혼을 하지만 이 결혼은 1년 만에 에디트 피아프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