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빛사랑채
개망초꽃 - 정호승 죽은 아기를 업고 전철을 타고 들에 나가 불을 놓았다 한 마리 들짐승이 되어 갈 곳 없이 논둑마다 쏘다니며 마른 풀을 뜯어 모아 죽은 아기 위에 불을 놓았다 겨울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붉은 산에 해는 걸려 넘어가지 않고 멀리서 동네 아이들이 미친년이라고 떠들어대었다 사람들은 왜 무시래깃국 같은 아버지에게 총을 쏘았을까 혁명이란 강이나 풀. 봄눈 내리는 들판같은 것이었을까 죽은 아기 위에 타오르는 마른 풀을 바라보며 내 가랑이처럼 벗고 드러누운 들길을 걸었다 전철이 지나간 자리에 피다 만 개망초꽃 시집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작가 : 정호승(1950- ) 경북 대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모르는 영희」가 당선되고, 1973년에는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는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반시』 동인. 소월시문학상 수상(1989). 국가 독점 자본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남한 체제 내에서 삶의 근거를 빼앗긴 서민들의 울분과 절망을 노래하면서, 그들에게 보다 나은 세계가 올 수 있다는 넉넉한 믿음을 갖게 해준다. 시집으로는 『슬픔이 기쁨에게』(창작과비평사, 1979), 『서울의 예수』(민음사, 1982), 『새벽 편지』(민음사, 1987), 『별들은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 1990) 등이 있고,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민음사, 1993) 등도 있다. < 감상의 길잡이 > 80년대 초에는 혁명의 피비린내가 서려 있었다. 한반도의 산천에 뿌려진 것은 힘없는 민중들의 피였으며, 온 나라의 공기를 진동시킨 것은 민중들의 비탄 젖은 신음과 통곡이었다. 이 작품은 그러한 광기를 앓고 있는 현실을 자연의 비유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죽은 아기를 태우는 미친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총에 맞아 죽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우시래기국이라는 비유로 알 수 있듯이 힘없고 초라하기만 한 백성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들짐승처럼 방황하고 죽은 아기는 전철이 지나가는 자리에 피어나 짓밟히는 개망초꽃으로 피어난다. 억압당하고 있는 민중의 현실이 자연의 모습을 빌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이란 강이나 풀, 들판 같은 것일까라고 묻고 있지만, 아마도 그 대답은 부정적일 것이다. 혁명은 자연의 순리와 다르게 인간의 폭력이 빚어내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 속에 고통 당하는 민중은 억제할 수 없는 슬픔에 미친년처럼 이리저리 쏘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은 슬픔을 슬픔으로, 고통을 고통만으로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은 아기를 업고 들로 나가 마른 풀을 모아 아기를 태우는 행위는 슬픔과 고통을 승화시키는 제사의식처럼 비장하다. 그 의식을 통해 현실의 모든 고통을 훨훨 털어 버리게 된다. 죽은 아기는 민중의 슬픔이 덩어리진 한(恨)을 상징한다. 그 아기가 개망초꽃으로 비록 작고 보잘것없지만 다시 소생하듯이, 민중의 한은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희망을 간직하는 생명력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해설: 조남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