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곶매백기완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하나를 알면 열을 행하고 개인을 이야기하면역사를 들이대고 사랑이 튕기면 꽃본 듯이 미쳐 달려가던 곳 추렴거리 땡전한푼 없는 친구가 낚지볶음 안주만 많이 집는다고 쥐어박던 그 친구가 좋았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전전하지 않았다돈벌이에 미친 자는속이 비었다 하고 출세에 연연하면 호로자식이라 하고 다만 통일논의가 나래를 펴면환장해서 날뛰다 밤이내려 춥고 떨리면 찾아가던 곳 식은 밥에 김치말이 끓는 화로에 내 속옷의 하얀 서캐를 잡아주던 말없는 그 친구가 좋았다 그것은 내 이십대 초반민족상잔(625전쟁) 직후의 강원도 어느 화전민 지대였지 열 여섯쯤 된 계집애의 등허리에 핀 부스럼에서 이따만한 구데기를 파내주고 우리는 얼마나 울었던가나는 나는 일생을 저 가난의 근원과 싸우리라 하고 또 누구는 민중과 결혼한다 하고 화전민이 답례로 보낸 옥수수 막걸리로 한판 벌린 웅장한 아름드리소나무그 위에 걸린 밝은 달 흐르는 맑은 물 뜨겁게 부대끼던 알몸의 낭만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저 밝은 달 저 밝은 물만을대상으로 노래할 수 없다며 허공을 쥐어박고 인간의 현장으로 뛰어들던 빛나던 눈의 그 친구가 좋았다 세월은 흘렀다 다시 강산에 폭풍이 몰아치고 이름있는 주소마다 자갈이 물렸다 더러는 먼저 가고 더러는 물러서서 바람이 차면 여울지던 곳 포구의 눈물이라는 늙다구리술집 술값은 통일된 후에 준다 하고한없이 굽이치는 이의 짓이란 마냥 그 모양이니 그러자 하고 이야기가 쭈삣하면 잡혀갈세라슬며시 덧문을 닫아주던그늘진 그 얼굴 그후 그 집은 망했다고 술꾼들은 발이 빠졌다 하고 그 찬란한 파국을 미리 울던늙은 술집의 늙은 그여자가 좋았다그래도 그래도 눈물은 분분했다가파른 현장에선 부패독재와 싸우는 이들의 남모를 예지가 불을 뿜는데 한 번 스친 밤의 꽃을 못 잊어 그여자가 잽혀있는 감옥소까지 찾아가 꽃다발을 잔뜩 안고 서서 울던 그 친구를 생각했다 바로 거기서 정서적 방랑이냐 이지적 결단이냐 꼬리가 꼬리를 잇는 말수를 냉정히 자르고 떠나간 그 사람 오오,그 확확 뚫던 억센 주먹이여이젠 다 어디서 무엇을 하기에흰머리가 휘날리는 상기까지삼십촉 희미한 등불에 젖어똥뚝간에서 바시락대는 쌩쥐소리에거대한 역사의 목소리 일러듣는 듯그렇다 기완아, 기완아~백번을 세월에 깎여도나는 늙을 수가 없구나 찬바람이 여지없이 태질을 한들 다시 끝이 없는 젊음을 살리라 구르는 마룻바닥에 새벽이 벌겋게 물들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