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 형무소 입구. 문화제를 알리는 조형물이 서 있었다. | |
ⓒ2006 최상진 |
정문을 따라 들어가 보니 본관 왼편 잔디밭에 세 사람의 사진으로 꾸며진 조그마한 무대가 마련돼 있었다. 무대 뒤편에는 고 이응로 화백의 작품 <구성>이 있었고, 무대 위에는 <군상>이 그려진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오후 7시가 가까워지면서 행사장에는 관계자와 시민들이 속속 입장했다. 그중 눈에 띄는 사람은 고 천상병 시인의 미망인인 목순옥(69)씨였다. 목씨는 "윤이상 평화재단에서 이렇듯 좋은 행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며 한껏 상기된 얼굴로 문화제가 시작하길 기다렸다.
민영 시인 "실질적인 명예 회복이 필요하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자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첫 프로그램으로 고 천상병 시인의 시에 작곡가 변훈이 곡을 붙인 '귀천'을 한 성악가가 나와 불렀다. 낮게 반복해서 울려 퍼지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가사가 비를 타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 가곡 <귀천>을 부르는 모습. |
ⓒ2006 최상진 |
"여기 몇 분의 정치인이 오셨습니다. 그중 몇몇은 인사말만을 하고는 나가버렸습니다. 이런 표면적인 행사를 한다고 명예회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술 한 잔 걸치며, 욕이나 퍼붓는 게 낫지요. 현실적인 명예회복부터 이뤄져야 합니다."
순간 민 시인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좌석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민 시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천상병 시인이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고 했을 때 '세상에 그럴 수가 있냐'며 크게 웃던 사람입니다. 천상병이라는 사람은 이데올로기로 묶을 수 없을 만큼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잘못 없는 이 친구가 아직까지도 간첩으로 여겨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짧게 이야기를 마친 민 시인이 '새'를 낭송하는 동안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이어 장마답지 않게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고 윤이상 작곡가의 '편지(김상옥 시)'와 첼로연습곡 '돌체'가 연주됐다. 그 선율은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갔다. 연주가 끝나자 동백림 사건의 당사자인 최창진 전 교수가 말을 이었다.
"저는 유학에서 돌아온 후 고 윤이상씨께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동백림 사건으로 인해 교수로 재직 중이던 대학에서 물러나 8년간 공직을 맡지 못했던 적도 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고 윤이상, 이응로, 천상병씨 모두 바로 이곳에서 억울하게 옥고를 치렀습니다. 위 세분은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인물입니다. 이런 인물들을 국가에서는 아직도 간첩으로, 매국노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명예 회복이 이뤄져야 합니다."
"지금 내리는 비는 천상병 시인이 고마워 흘리는 눈물"
이날 문화제의 마지막 순서로 유가족 대표해서 목순옥씨가 단상에 올랐다.
"제 뒤에는 천상병 시인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은 천원을 들고 좋아하시던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이처럼 시인은 평소 아이같이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내리는 이 비도 시인이 여기 모인 여러분들께 너무 고마워서 흘리는 눈물일지도 모릅니다."
▲ 고 천상병 시인의 미망인 목순옥씨(오른쪽)와 백기완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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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백림 사건'이 있은 지 18년이 지난 후에야 태어났다. 그리고 사건에 대해서는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것이 전부였다. 이런 내게 이날의 문화 행사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당사자를 만나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행사 내내 내린 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듯 고 이응로 화백, 윤이상 작곡가, 천상병 시인의 숨결이 내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한 문화제였다.
▲ 문화제 무대. 세 예술인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
ⓒ2006 최상진 |